헐거운 구르기와 정직하지 않은 회피 판정
게임을 켜고 필드에 서자마자 달리고 굴러봤다. 캐릭터의 기본 거동은 무난한 편이지만 회피 기동을 섞는 순간 미묘한 둔탁함이 손끝에 걸린다. 구르기 시작 지점에 무적 판정이 아주 칼같이 들어가지는 않고 적의 투사체나 돌진 궤적이 내 몸에 닿는 기준선도 살짝 뭉툭하다. 정교하게 적의 공격 프레임을 읽고 파고드는 정통 액션을 기대했다면 첫인상에서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다.
후딜레이 캔슬 반응도 조금씩 밀린다. 무기를 휘두르거나 장전하는 도중에 위기를 감지하고 구르기를 누르면 즉각 반응하기보다 이전 모션이 끝자락까지 재생된 뒤에야 굴러간다. 몬스터들의 공격 히트박스 역시 겉보기보다 넓게 잡혀 있어서 스치지 않은 것 같은데 맞고 튕겨 나가는 상황이 종종 벌어진다. 조작감 하나로 승부를 보는 하드코어 액션의 기준을 들이대면 아쉬운 구석이 한둘이 아니다.

팰을 방패 삼아 총을 쏘는 난타전과 던전 탐색
직접 칼을 휘두르고 활을 당기는 초반을 지나 화기를 손에 쥐면 전투의 결이 달라진다. 밀렵꾼 무리와 맞붙거나 던전 깊은 곳에 들어갈 때 플레이어가 혼자 구르고 패링하는 싸움이 아니라 꺼내 둔 팰과 함께 어그로를 분산시키는 식이다. 위험한 순간에는 팰을 앞세워 적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내고 뒤에서 약점을 조준해 사격하는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손맛의 깊이는 얕지만 난타전 자체의 템포는 빠르다. 육지나 바다를 달리는 탑승 팰에 올라타서 필드를 누비고 공중을 날아 적의 머리 위에서 공격을 퍼붓는 맛도 제법 쏠쏠하다. 보스급 팰이나 밀렵꾼 거점을 털 때 조작감이 둔해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화력과 물량 공세로 찍어누르는 감각이 묘한 쾌감을 준다.

노동법 없는 거점 자동화와 번식의 굴레
생존과 거점 건축으로 넘어가면 이 게임은 그야말로 시간 도둑이다. 필드에서 두들겨 패서 포획한 팰들을 기지에 풀어두면 알아서 불을 지피고 전기를 만들고 채굴을 한다. 파종과 관개, 수확에 특화된 녀석들을 밭에 몰아넣고 공장을 지어 작업을 맡기면 먹이만 축내며 밤낮없이 물건을 찍어낸다. 팰이 탈진할 때까지 굴리는 이 기괴한 공업 자동화에서 도무지 손을 뗄 수 없다.
번식과 유전 시스템도 수집욕을 자극한다. 부모 팰의 특성을 물려받아 더 강한 개체가 태어나다 보니 희귀한 패시브를 조합하려고 알을 부화기에 끝없이 밀어 넣게 된다. 사냥 금지 구역에 몰래 들어가 경비병의 눈을 피해 멸종 위기종 팰을 밀렵해 오는 범죄 행위까지 얹혀 있어 생존 장르 특유의 파밍 동기가 끊이지 않는다.

스팀 3만 2천 원의 값어치와 한국어 인터페이스
스팀 정가 32,000원은 게임이 담고 있는 방대한 콘텐츠를 생각하면 꽤 합리적인 편이다. 한국어 지원은 음성 더빙이 빠졌지만 메뉴와 튜토리얼, 팰 도감과 아이템 설명까지 인터페이스 자막이 잘 번역되어 있어서 언어 장벽 없이 즐길 수 있다. 친구를 불러 모아 멀티플레이로 거점을 같이 짓고 대전과 교환을 즐기기에도 부족함이 없다.
오픈월드 곳곳의 오브젝트 배치나 세부 마감은 거칠고 정밀한 액션의 긴장감도 부족하다. 하지만 팰을 잡아서 일터에 던져 넣고 총을 쏘며 던전을 털어먹는 핵심 루프만큼은 확실하게 굴러간다. 만듦새의 결함을 원초적인 파밍 재미로 틀어막은 게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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