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워진 조작과 화면
스팀에 올라온 가격표를 보고 잠시 멈칫했다. 69,800원이라는 정가는 결코 가볍지 않다. 게다가 이미 십수 년 전에 끝을 본 이야기를 다시 붙잡는 일이라 시작 전에는 망설임이 컸다. 하지만 게임을 켜고 월광관 고등학교 기숙사에 들어서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완성도 덕에 망설임이 가셨다. 4K 해상도와 초당 60프레임을 기본으로 받쳐주니 화면 전환이 부드럽고 캐릭터들의 움직임도 자연스럽다.
메뉴 화면부터 전투 돌입까지 이어지는 인터페이스 연출은 감각적이면서도 빠르다. 버튼을 누를 때마다 늘어지는 반응 없이 즉각 창이 열린다. 자막은 한국어를 깔끔하게 지원해서 몰입에 방해가 없다. 비록 한국어 음성은 빠졌지만 원작 성우진의 연기가 빈자리를 메운다. 전반적으로 조작 동선이 쾌적하게 정돈되어 손이 편하다.

단조로운 탑 오르기를 버티게 만드는 전투 호흡
이 게임의 던전인 타르타로스는 구조상 끝없는 층계식 반복 파밍에 가깝다. 같은 배경과 비슷한 통로를 수십 층씩 오르는 과정은 자칫 지독한 지루함을 부르기 십상이다. 이번 작 역시 그 뼈대 자체를 통째로 갈아엎지는 못했다. 70층 부근을 넘어가면서 층 구조의 기계적인 반복이 손에 익을 때쯤이면 하품이 나오는 순간이 분명 찾아온다.
다만 전투 템포가 대단히 빨라져서 그 둔탁한 피로를 상당 부분 덜어낸다. 약점을 찌르고 곧바로 추가 공격으로 이어가는 흐름이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다. 아군에게 행동 기회를 넘기는 시스템 덕분에 전략을 짜서 적을 한 턴에 쓸어 담는 맛이 좋다. 단순한 층계 반복이라도 한 판 한 판의 전투가 순식간에 정리되니 시간을 억지로 뺏긴다는 불쾌함은 덜하다.

추가 에피소드로 메운 동료들의 빈틈
낮 시간의 학교생활과 방과 후 일상은 여전히 촘촘한 시간표 관리를 요구한다. 누구와 시간을 보내고 어떤 능력치를 올릴지 저울질하는 과정이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해 준다. 여기에 새로 들어간 남성 동료들과의 사이드 에피소드가 꽤 쏠쏠한 재미를 준다. 과거 원작에서는 다소 서사가 겉돌던 인물들이 일상 대화를 거치며 특별과외활동부 안에서 제자리를 찾아간다.
음성이 추가된 대화 장면도 많아져서 이야기를 따라가는 맛이 좋다. 오프닝을 비롯해 새로 제작된 애니메이션들도 튀지 않고 극 중에 잘 녹아들었다. 하루하루 캘린더를 넘기며 시험을 준비하고 동료들과 시간을 쪼개 쓰는 일련의 루틴은 여전히 사람을 붙잡아두는 힘이 강하다.

익숙한 단점마저 품고 가는 충실한 복각
원작의 틀을 지나치게 건드리지 않으려다 보니 고유의 구조적 한계도 안고 간다. 타르타로스를 오르내리는 반복 파밍 구조는 편의성을 아무리 덧발라도 근본적으로 노동에 가깝다. 후반부로 갈수록 전투 연출의 화려함도 눈에 익어 던전 공략 날에는 피로감이 서서히 밀려온다. 플레이 타임을 길게 뽑아내기 위해 던전을 여러 층으로 쪼개둔 옛날식 설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60시간 넘게 패드를 붙잡을 수 있었던 바탕에는 정갈해진 만듦새가 있다. 불필요하게 늘어지던 잔로딩을 쳐내고 인터페이스와 조작감을 쾌적하게 갈아엎었다. 구작을 기억하는 사람에게는 말끔해진 추억의 복원이고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진입 장벽을 대폭 낮춘 괜찮은 턴제 RPG다. 69,800원이라는 가격이 아깝지 않을 만큼의 완성도는 충분히 갖췄다.





댓글 0
추천순최신순아직 댓글이 없습니다.